다산 선생으로부터 목민심서를 받고 있는 준영~
5월2일(월) 2017년
다산기념관(전라남도 강진군)
다산 정약용선생이라면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며 목민심서를 저술하였고
천주교와 관련, 당파싸움에 밀려 귀양살이를 한 정도로밖엔 몰랐던 무식이 충만한 은빛드보라~
이번 남도여행 강진의 다산 기념관을 방문하면서
다산 정약용선생의 일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참 좋았다.
전시실에는 다산 정약용의 출생부터 성장,관직생활, 유배생활,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의 저술활동 등 다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요약] 다산 정약용의 일생
1762년(1세) 남양주 마재마을에서 태어나다
1768년(7세) 천재소년 시를 쓰다. 4살 때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고 7살 떄 부터 시를 지은 신동이다
1784년(23세) 서학(천주교)을 접하다. 친구 이벽과 서학(서양학문)에 대해 토론하고, 큰 충격을 받다
1989년(28세) 정조 임금의 아버지(사도세자) 묘소에 참배하러 가기 편리 하도록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하다
◈ 배다리: 배를 나란히 엮어 강을 건널수 있게 만든 다리
1792년(31살) 거중기를 이용하여 화성(수원성)을 쌓다.공사비 4만냥을 아껴 백성들의 칭송을 받다
1794년(33세) 암행어사가 되어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다
1799년(38세) 과학수사관 정약용 - 형조참의가 되어 과학수사관으로 활약하다(함봉련사건)
1801년(40세) 강진으로 유배길 - 신유박해 때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고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오다.
◈ 셋째 형님은 사망, 둘째 형님은 흑산도로 유배가다
1801~1818년(40~57세) 강진에서의18년 귀양살이 - 학문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다.
◈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며, 국가 개혁을 주장하는 책을 펴내다.
1822년(61세) 스스로 묘지명을 짓다 -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한 글인 여유당집(500권)을 펴낸다.
1836년(75세) 회혼 잔칫날 아침 - 결혼 한지 60년 되는 날에 고향 마재에서 눈을 감다
1910년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끝-
다산 기념관에 도착~
다산기념관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지나면서 제일 처음 보이는 다산 연표와 함께 있던 모형
대리석 바닥이 좀 차겁겠습니다요~
다산 연표
다산은 1783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고 정조의 총애를 받게된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도부승지,병조참의,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배다리, 수원성 기중기 설계등 기술관료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다산의 유배길
한양 - 나주율정점- 사의재 - 보은산방 - 이학래의 집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선생을 아끼고 사랑하던 정조 임금이 1800년 6월 28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다산 선생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반대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지켜주었던
임금의 승하는 다산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임금이 죽자 다산은 동료들과 함께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다산 정양용 선생께 목민심서를 선물로 받았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한 곳이자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이에 강진에서 다산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강진군에서 다산기념관을 개관하였다.
다양한 다산 친필 간찰과 제자들의 유물들을 통해
강진에서 다산의 학문과 성과를 느낄 수 있다.(출처:다음백과)
다산기념관 안내 팜플렛 앞면~
다산기념관 안내 팜플렛 뒷면~
우리 일행을 싣고 다산기념관을 출발한 여행사의 버스가
10여분 정도 달렸 갔을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 산을 강진의 소금강이라고 말해줬다..
소금강까지는 아닌것 같은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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